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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병환자의 삶

만성 콩팥병 환자 이야기 -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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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상대의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의상대사 마치 거미줄의 한편에서 신음하는 괴로움이 다른 반대편 거미줄에서도 그 고통이 전해지는 것처럼 이 세상이 거미줄의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짜여 있어서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저 혼자 일어난 일은 없으며 이 모두가 연관되어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과 결과로 얽히고설켜있는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악을 선택하기보다는 서로에게 연민을 갖고 어렵지만 선을 베푸는 것이 결국 모두를 위해 선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있는 길이라는 맥락의 언급을 한 바 있습니다.

 

남을 위한 선한 행동으로서의 연민에 대해서 주역에서 ' 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다. 남는 것이 적으면 자신에게서 그치나 남는 바가 크면 세상에 미친다'라고 했습니다. 

 

1. 만성 콩팥병 환자가 느끼는 연민

연민은 좋은 감정입니다만, 만성 콩팥병 환자의 경우 이게 지나쳐 자기혐오나 자기 연민에 과도하게  몰입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해석되는 둘은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어 보입니다. 미워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은 그만큼의 간극을 가진 감정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 모두 지나친 자기화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스스로를 너무 오랜 시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인간은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거나, 지나치게 혐오하게 되는 굴레에 빠집니다.

 

누구나 스스로를 애달파하면서도 미워하는 상반된 감정을 느낍니다. 하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자기 연민과, 이상과 현실에서 자신의 모습이 다름을 느끼면서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분노함으로써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혐오는 스스로를 충분히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기혐오가 무서운 점은 이런 내면의 자기비판은 더 많이 생각하면 할수록, 더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크기가 더 커진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게 어느 순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 불안감에 압도되면 이를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기 시작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자기혐오는 인생에서 성취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불안 및 우울증과 같은 정신 건강 상태를 악화시킵니다.

 

"우리가 사람이여? 행동거지가 불편하니 사람답게 삶을 살지 못하고 그러니 우리 환자들이 너무 불쌍하지"

 

"정상적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내가 어쩌다 이런 병에 걸려서 이렇게 됐나 나 자신 한심하고 딱하기도 해요"

 

"너무 서럽다"

 

"잔병 효자 없다는 말이 맞아, 너무 무 관심해, 그럴 때 너무 서럽고 내 자신이 불쌍하게 생각돼" 

 

2. 연민은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까요

 

다행스러운 점은, 자기혐오라는 생각은 내가 하는 생각과 감정일 뿐이지, '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많은 장점들과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고, 무엇보다 '더 잘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혐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총 4단계의 방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1) 자기혐오를 느끼게 만든 대상을 인식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 외면하고 싶은 이유를 되짚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2) 자기혐오의 원인이 된 감정을 찾음

자기혐오를 발생시키는 감정을 찾습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버려지기 싫은 마음, 무시당하기 싫은 마음 등 무엇을 원하기 때문인지, 어떤 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혐오를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답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3) 자기 스스로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확인

자신을 남과 비교하거나 경쟁에서 물러나는 것스스로를 낮게 보는 행동이며 결과적으로 자신을 위축시키기 때문에 스스로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도록 합니다.

4)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수용한 후 극복

스스로 가지고 있던 아픔에 공감하고 감정 및 행동을 수용합니다. 나도 모르게 반복하고 있던 행동들을 스스로 정리해 본 뒤 이 행동들을 멈추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나씩 바꿔나가려는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감과 자존감이 높아져 자기혐오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3. 만성 콩팥병 환자 이야기 - 최은영(동아일보 발췌)

주부 최은영 씨(50)가 중학생이었을 때다. 우연한 기회에 병원 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신장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신증후군 진단이 떨어졌다. 단백뇨가 나오고, 몸이 부으며, 저 알부민혈증이 발생하는 병이다. 당시 최 씨 체중은 62㎏이었다. 의사는 체중부터 빼라고 했다. 이뇨제를 먹어가면서 일주일 사이에 10㎏을 뺐다. 그 덕분이었을까. 몸이 조금은 좋아진 것 같았다.

그 후로도 최 씨는 ‘조심’이란 단어를 늘 새기며 일상생활을 해 나갔다. 병원에도 정기적으로 다녔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이후로 바빠졌다. 게다가 개인사정으로 인해 병원에 자주 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결국 나중에는 아예 병원을 가지 않게 됐다. 그 대신 이뇨제를 먹으면서 스스로 관리했다.

다행히 이상 증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관리를 잘해서 그런 것인지, 몸이 나아져서 그런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어쨌든 최 씨는 건강한 상태로 대학을 졸업했다. 이대로 신장 질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 결혼 준비로 힘든 거라 여겼는데…

25세가 되던 1998년, 최 씨는 결혼식을 치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몸에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신혼여행지에서 살짝 숨이 차고 어지러운 증세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그런 것이려니 생각했다.

아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로도 증세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도가 더 심해졌다. 최 씨는 여의도성모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검사 결과 최 씨는 만성신부전증 진단을 받았다. 당장 처치가 필요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의료진은 최 씨를 입원시킨 뒤 곧바로 신장 투석을 시작했다.

의료진은 논의 끝에 최 씨를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후 양철우 서울성모병원 신장내과 교수가 최 씨의 진료를 맡았다. 양 교수는 “최 씨뿐 아니라 만성신부전증 환자 상당수가 숨이 차고 어지러운 원인이 신장 질환이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라고 말했다. 신장 기능이 떨어지면 노폐물이 제때 배출되지 못해 여러 증세가 나타나는 요독증이 발생한다. 하지만 숨이 찬 증세 때문에 심장 질환으로 오해한다는 것.

양 교수는 “멀쩡한 것 같아도 일단 요독증이 나타나면 신장 기능은 5~10% 정도 남았다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만약 소변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면 신장 기능은 5% 정도도 남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혈액 투석을 하는 중에도 신장 기능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졌다. 신장 이식 외에는 해법이 없는 상태. 뇌사자의 장기 이식을 기다리며 버텼다. 얼마 후 최 씨와 조직 적합도가 높은 뇌사자 신장이 나왔다. 1999년 10월, 최 씨는 뇌사자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사실 최 씨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당시만 해도 뇌사자를 발굴한 병원에 장기 이식 우선순위가 주어졌었다. 서울성모병원이 발굴한 뇌사자였으니 이 병원 환자인 최 씨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최 씨는 아직 20대의 젊은 나이였고, 신장 이식이 당장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점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뇌사자 신장을 받을 수 있었던 것.

 

● 첫 아이 출산 후 신장 다시 나빠져

시간이 흘렀다. 장기 이식 거부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최 씨는 다시 건강해졌다. 그러자 아이를 갖고 싶은 열망이 커졌다. 하지만 임신이 마냥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양 교수는 “신장을 이식받았다면 임신 고위험군에 해당한다. 임신중독이 생길 위험도 커진다”라고 말했다. 이 경우 임신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식한 신장까지 손상될 수 있다.

하지만 최 씨 부부는 아이를 진정으로 원했다. 양 교수는 최 씨가 임신할 수 있는 상태인지 살폈다. 일단 거부 반응은 없는 상황. 단백뇨가 나오거나 혈압이 높지도 않았다. 양 교수는 잘 관리하면 임신 출산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정말로 이 판단대로 됐다. 2003년, 최 씨 부부는 그토록 원하던 아기를 임신했다. 이어 2004년 6월에는 남자 아기를 무사히 출산했다. 아기는 2.57㎏의 저체중아로 태어났지만, 건강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출산의 기쁨도 잠시. 최 씨의 건강이 악화했다. 출산이 임박할 때부터 신장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출산 후 급속도로 나빠졌다. 검사해 보니 신장의 30% 정도가 망가져 있었다.

약물 복용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장기를 이식하면 12시간 단위로 면역억제제를 복용해야 한다. 시간을 엄격하게 지켜야 약물 농도를 유지할 수 있다. 복용 시간이 이르거나 늦춰지면 농도가 달라지면서 면역 거부 반응이 오기 시작한다. 최 씨의 경우 출산한 후 아기를 키우는 과정에서 약 복용 시간을 가끔 지키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양 교수는 “최 씨는 그나마 약을 꼬박꼬박 먹은 편이다. 가끔 10대와 20대 환자 중에서는 아예 약을 먹지 않았다가 신장이 다 망가진 후 병원을 찾는 사례도 더러 있다”라고 말했다.

최 씨의 신장 기능은 갈수록 떨어졌다. 양 교수는 “출산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빠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점점 나빠지더니 다시 투석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말했다. 최 씨는 아기를 출산하고 약 2년이 지난 2006년 4월, 다시 혈액 투석을 하기 시작했다.

 

● 투석하며 둘째 출산 성공

투석해 본 환자들은 그 고통을 너무나 잘 안다. 최 씨는 그 후로 매주 세 번씩 병원을 찾아 투석 치료를 받았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흘렀다. 그렇게 힘겨운 투석 치료를 5년째 이어가고 있었다. 2011년 말, 최 씨는 샤워하다가 배속에서 아기가 꿈틀대는 걸 느꼈다. 둘째 아이 임신이었다. 검사해 보니 이미 임신 5개월을 넘긴 상태였다. 다만 입덧이 없어서 최 씨가 임신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사실 임신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오랫동안 투석 치료를 받았기에 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영양상태는 썩 좋지 않았고, 호르몬 균형도 깨져 있었다. 임신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란 뜻이다. 양 교수도 놀랐다. 양 교수는 “투석 치료 중에 임신이 어려울 뿐 아니라 설령 임신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10개월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연 유산한다. 출산한다면 그 자체가 의학계에 보고될 만한 드문 사례”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 씨는 둘째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출산을 결심했다. 양 교수가 보니 태아는 이미 상당히 성숙했고 발육 상태가 좋았다. 산모인 최 씨는 임신중독의 징후가 없었다. 양 교수도 임신을 유지하고 출산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양 교수는 해외 치료 사례를 수집했다. 데이터를 분석한 뒤 치료법을 재점검했다. 우선 투석 치료 일정부터 조정했다. 그전에는 매주 3회, 각각 4시간씩 투석을 했다. 이를 주 6회로 늘리는 대신 투석 시간을 각각 3시간으로 줄였다. 태아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폐물을 조금씩 자주 빼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와 함께 조 씨의 혈압이 정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했고, 조혈호르몬 투여량을 늘려 빈혈을 없앴다. 체중도 다른 산모와 비슷한 수준으로까지 늘렸다.

산모와 의료진 모두가 힘을 합쳤다. 그 결과 2012년 3월, 최 씨는 둘째 아이를 무사히 출산했다. 40세의 나이에 투석 치료를 견뎌내면서 얻은 공주였다. 첫째 아이 출산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아이는 2.6㎏의 저체중으로 태어났다. 이에 대해 양 교수는 “신장 이식을 한 경우 대부분 저체중아가 태어난다”라고 덧붙였다. 둘째 아이 또한 첫째 아이와 마찬가지로 건강했다.

 

● 의사와 환자, 평생 동반자

보통 의사와 환자 사이의 ‘라뽀’가 좋을 때 치료 효과도 좋다는 말이 있다. 라뽀는 친밀한 유대관계를 뜻한다. 최 씨와 양 교수의 라뽀는 상당히 좋다. 최 씨는 양 교수를 무한 신뢰했고, 그런 최 씨를 양 교수는 가족처럼 대했다. 양 교수는 “의사와 환자로 만난 지 2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최 씨가 25세로 보인다”라며 웃었다.

양 교수는 최 씨의 둘째 출산을 높이 평가했다. 양 교수는 “투석하면서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세계 여러 나라를 보더라도 매우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양 교수는 이어 “의사는 환자가 건강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환자의 노력이 보태질 때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라고 덧붙였다. 최 씨가 25년 동안 혈액 투석을 해 왔지만, 꿋꿋하게 버텨왔으며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은, 그만큼 최 씨 본인이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란다.

실제로 둘째 아이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최 씨는 이미 6년째 투석 치료를 받고 있었다. 힘든 시기였다. 투석하는 날은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는 느낌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대로 누워 있어야만 했다. 음식은 먹을 수 없었고, 되레 토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투석하지 않는 날에는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어울렸다. 병을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기 위해서였다. 이와 별도로 에어로빅을 열심히 했다. 이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투석 치료를 오래 하다 보면 요독이 쌓이면서 여러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최 씨는 그런 증세가 덜했다. 게다가 아기를 키우면서 삶에 대한 욕구도 더 강해졌다. 이 모든 점이 최 씨가 투석을 극복하고, 아기까지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올해 1월, 최 씨에게 행운이 다시 찾아왔다. 뇌사자 신장 재이식 수술을 받게 된 것. 최 씨는 이번만큼은 평생 신장을 다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수술하고 3개월이 지났을 때 검사해 봤더니 이식 거부 반응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기자와의 인터뷰가 예정된 이날, 다시 검사했는데, 역시 모든 게 정상 수준이었다. 양 교수는 “1년 이내에 거부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10년 이상 장기가 갈 확률이 90%를 넘는다. 그럴 거라고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양 교수는 이어 “그 투석을 다 견디고 25년째 만성신부전증을 극복하며 살았는데, 앞으로 더 건강하게 살 거라고 확신한다”라며 웃었다.

물론 최 씨는 그 어느 때보다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다. 아무래도 면역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날 음식은 절대 먹지 않고, 채소도 익혀 먹는다. 운동도 빠뜨리지 않는다. 매주 2회 필라테스를 하고, 매일 5000보 이상 걷는다. 살을 찌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다 보면 식욕이 당기는데, 이때 무작정 먹었다가 살이 찌면 콩팥에 악영향을 미친다. 체중 조절이 필요한 이유다. 최 씨는 “몇몇 제약이 있긴 하지만 지금 아주 평화롭다. 이대로만 잘 유지할 계획”이라며 웃었다.

 

누구나 가지는 연민의 감정은 좋은 감정입니다만, 그게 지나쳐 자기혐오로까지 발전하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하게 합니다. 지나친 연민의 감정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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