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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병환자의 삶

만성 콩팥병 환자 이야기 - 혈액투석 거부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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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은 혈액투석 치료를 권유받았으나 초기에는 투석 자체를 거부하고 버티며 적극적으로 치료받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혈액투석이라는 생소한 치료를 받아야 하는 현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며 처음 맞닥뜨린 투석실의 풍경에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또한 환자들은 이제 평생 혈액투석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삶을 매우 비관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기저 질환의 오랜 투병 끝에 다시 찾아온 새로운 질병, 치료과정에 의해 나타나는 증상과 변화들은 환자들이 삶 자체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인 심정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환자들은 무작정 투석을 받지 않고 버티거나 지푸라기 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약, 대체요법 등 다른 치료방법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1. 투석직전 환자들이 말해준 "투석거부의 심리"

1) 투석도입 전이 투석거부 심리

"얼떨결에 투석실 따라 올라갔는데... 투석실 가서 보니까 너무 무서운 거예요... 누워있는 환자들 얼굴도 무섭 고... 기계에 핏줄도 걸려 있고... 티브이에서 보는 그런 장면 이 눈앞에 있는데... 정신이 그냥 하얘졌어요..."

 

"투석은 진짜 내가 죽어도 안 한다 했으니까... 병원에는 안 가고... 올리고 소화 안 되고 못 먹으니까... 이틀에 한 번씩 영양제 닝게루 맞고 하다가 근 한 달 가까이 어째 어째 버티고 있었죠..."

 

"일주일을 덮어쓰고 울면서 죽을 생각 밖에 안 했지... 몇십 년을 아팠는데... 또 죽을 때까지 피를 돌리라 하니까.. 미련 없이 여기서 끝낸다 생각하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야 되나... 손목을 그어야 되나.. 맨날 그 생각이었어요..."

 

“일생 동안 투석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쇼크였다. (34세 남자)

 

“이젠 일생 동안 낫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더 쇼크였다. 확실히 말해서 인생을 체념하는 감정이었다.” (39세 남자)

 

“죽기보다 싫다. 투석을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22세 남자)

 

“바로 이식해라. 그러지 않으면 죽겠다.” (20세 남자)

 

“투석실에 들어가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떻게 안 되는 것인가? 다른 방법이 없는가? 그러나 고통을 참고 들어가게 되었다. 싫다, 싫다고 말하면서…” (30세 남자)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투석에 들어가는 것이 싫다. 일생 투석을 계속하는 것이 싫다”라고 말합니다. 투석 전에 벌써 투석치료에 대해서 강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투석도입기에 있어서 투석거부 심리

“그렇게 말을 했어도 하는 수 없이 투석은 시작된다. 그렇게 시작하고 보니 이런 것 일생 동안 계속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는 심정이다.” (35세 남자)

 

“이런 것 일생 동안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방법밖에 없는가?” (29세 남자) “투석은 싫다. 처음 보니 이건 안 되겠다.”라고 생각했다. (45 세 여자)

 

“투석이란 더 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괴로운 것이라고는 생각 안 했다. 싫다.” (48세 여자)

 

“투석을 시작하기 전에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시작해 보니 이것은 싫다”라고 모두들 생각한답니다. 특히 “일생 계속할 것이라는 말에 손들었다", “도망가고 싶다” “투석에서 해방되고 싶다”라고 강력하게 생각했고 이것이 이런 식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3) 중간기의 있어서 투석거부 심리

2-3년 경과되어서 투석에 익숙한 시기이지만 아직 습관이 안된 사람들도 있다.

 

"투석 가는 건 싫다. 현관에서 앉아버리고 말았다.” (35세 남 자, 기혼)

 

“투석이 없으면 다른 인생이 있을 것 같다. 투석을 그만두고 싶다.” (33세 여자)

 

“싫다, 싫다 하면서도 하고 있다.” (40세 남자)

 

“다른 나라(북조선)에 납치된 사람과 마찬가지다. 나는 투석에 납치된 처지다. 하루라도 빨리 해방되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33세 남자)

 

“1분이나 2분이라도 빨리 바늘을 빼고 싶다.” (40세 여자)

 

“투석이 시작되면 빨리 끝나지 않나?라는 생각뿐이다.” (38 세 여자)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주 3일 구속되는 것은 견딜 수가 없 다. 해방되고 싶다.” (34세 여자)

 

“투석이 점차 싫어졌다. 처음엔 그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싫 고 싫어서 견딜 수가 없다. (40세 남자)

 

투석거부의 심리가 강하면 투석에 길들여지지 않는다.

 

2. 생체신이식환자가 말하는 투석거부의 심리

여기에 투석거부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환자 분이 있습니다. 즉, 투석치료가 싫어져 견딜 수 없을 때에 육친의 누군가로부터 신장이식을 받으려고 입원해 있는 투석 환자들입니다. 의학적으로 말하면 그들의 신장이식이 성공할 때까지는 아직 투석환자입니다. 그러나 신장이식을 직전에 두고 그들의 심중에는 투석이 이미 과거의 것이고, 그렇게 싫은 투석이 “신장이식을 성공시키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식 전 준비 의료”로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가까운 장래에 이 싫은 투석하고는 곧 이별한다는 강력한 기대감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해방된다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직 투석환자”이지만 그들의 심중에는 “투석환자가 아니다”라는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런 사람 들은 우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얼마나 투석이 싫었던가!”를 웅변하여 적극적으로 여러 가지 말로써 표현해 줍니다.

 

“지금부터 이식을 앞두고 더욱더 투석을 거부하는 맘이 든다. 만약 이번(형에게서 받는 신장)에 실패하면 다음은 사체 신이식 을 희망한다.” (39세 남자)

 

“이식이 실패되면 다시 투석에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고 싶 다.” (36세 남자)

 

“이번에 어머니로부터의 신장이 실패되면 다음은 동생 것을 받고 싶다.” (28세 남자)

 

“투석은 싫다.” “일생을 투석하라니!” 투석 환자가 늘 마음속에 깊이 가지고 있는 것은 “어째서 이런 것을 계속해야만 되는 가?”라는 것입니다. 한 번이 아니고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되도록 투석 같은 것은 안 했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든 이런 것을 안 할 방법은 없는가?”라는 생각이 투석 거부의 심리입니다. 나리타는 이런 심리를 투석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말했습니다. 확실히 영어에서는 strong denial feeling to hemodialysis라든가 strong negative feeling for hemodialysis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현재 투석을 받고 있는 환자에게 “당신은 정말로 투 석 같은 거 싫어합니까?”라고 물어도 “네, 그렇습니다.”라는 대 답은 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다 해서 어떻단 말입니까? 다른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라는 노기에 찬 대답이 돌아올 것입니다. 이러한 물음 그 자체가 환자의 마음을 공연히 거슬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투석거부의 심리에도 불구하고 만성 콩팥병 환자는 “만약 살고 싶으면” 혹은 “죽지 않고 싶으면” 다음의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1) 혈액투석, 복막투석, 신장이식 셋 중 하나를 택해야 하며, 그중 여러 가지 조건상 혈액투석이 가장 많이 선택되고 있다.

2) 혈액투석을 계속하면 살고 중지하면 1주일 내지 열흘이면 사망한다.

3) 무슨 일이 있어도 정해진 날짜, 정해진 시간에 투석센터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일생 동안 이를 반복해야 된다.

4) 한 번에 4~5시간 구속되어 묶여 있어야 된다.

5) 일정한 식사와 음료수 제한이 필요하다.

최소한 이러한 조건이 투석환자 전원에게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서 의료인 측으로부터 교육되고 엄격하게 지킬 것이 요청됩니다.

 

3. 만성 콩팥병 환자 이야기 - 의사로서 일본에서 39년간 혈액투석을 받아온 경험(하루키 시게가즈)

나는 1940년 생입니다. 따라서 올해 만 71세가 되었습니다. 일본 의학부 5학년 학생 (본과 3년에 해당) 시절, 즉 1965년 겨울 감기 걸린 끝에 급성 편도선염이 되었습니다. 이 편도선염 이 결과적으로 나의 그 후 인생을 변화시키는 이벤트가 되고 말 았습니다. 편도 적출수술을 받았습니다만, 결국 급성 신장염이 유발되었습니다. 휴학을 하고 1년간 안정, 보온 및 식사요법에 집중했지만 단백뇨는 여전히 지속하는 상태였습니다, 다음 해엔 내 희망대로 복학했습니다. 일 년 더해서 의학부를 졸업하고 싶었습니다. 만성 신장염이면 이 병을 갖고 끌고 가야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에 일 년 늦게 의학부를 졸업하였습니다.

 

만성신장염을 가지고 일 년간 인턴을 했고 1969년에는 정신과학교실의 교실원이 되었습니다. 의사로서의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다행히 매년 행한 신장기능검사는 정상이었고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단백뇨는 약간 나오는 정도, 나는 피로를 피하고 감 염에 주의했습니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로서 나는 점점 바빠졌습니다.

 

나는 집사람과 1976년 1월에 처음 만났습니다. 선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급속하게 친해졌습니다. 말하자면 연예상태였죠. 1월에 만나서 4월에 약혼했고 5월에는 둘이서 결혼식장을 정했습니다. 이 기간에 나는 신장기능검사를 잊고 하지 않았습니다. 6월에 들어가서 기운이 없고, 밤에 오줌을 자주 누고, 피곤해졌습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어서 결국 파견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검사 결과 나는 “요독증”에 걸려 있었고, 그것은 청천벽력과 같았습니다. “이럴 수가 없다”라고 부인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내 마음은 신부전일 수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신체는 정직했고, 얼마 경과 후에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졌고, 맛있게 보여도 입에 들어가면 욱하고 넘어왔습니다. 이러한 메스꺼운 증상이 이상하였습니다. 기분은 먹고 싶었는데 몸이 받아주질 않았습니다. 그런 중에 낮에는 졸리고 밤에는 잠이 오 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투석 혹은 인공신장이 아직 보 편화되어 있지 않았고 일부 부유한 사람만이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명이 돈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당시 근무하던 보통 종합병원에서는 투석을 시행하지 못하 고 있었고, 나는 동경의 성누가국제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이 병 원은 투석으로 유명해서 내가 학생이었을 때부터 나의 신장염을 돌보아준 의사가 있었습니다. 니노하라 선생과 시바가기 선생은 내 주치의였고 시바가기 선생은 시애틀의 워싱턴 대학에서 Scribner 교수로부터 교육을 받고 귀국한 분이었습니다.

 

나는 내 투석 순번이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순번이 오지 않았는데 이때쯤 약간의 의식 혼탁이 일어났습니다. 망원경을 거꾸로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감각일까 요? 가족과 친구들이 문병을 왔지만 그들이 멀리 보였습니다. 그 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습니다. 나의 컨디션은 점점 악화되어 서 낮에는 꾸벅꾸벅 졸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먹을 수 도 없었습니다. 이때 이 병원에 투석기계가 3대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줄을 서서 자기 순번을 기다리 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투석을 바라다가는 시작을 하기 전에 죽고 말 것 같았습니다.

 

한편, 나의 어머니와 아내는 투석을 잘해주는 병원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살고 싶다!”가 내 본마음이었습니다. 1972년 7 월, 드디어 투석을 시행해 줄 수 있는 병원을 어머니와 아내가 찾아내었는데 그것이 동경여자의과대학 신장센터였습니다. 시작 한지 1년 된 병원이었으니, 구명보트를 잡아탄 것과 같았습니다. 여기서 오오다 카즈오 선생을 만났습니다. 그 후 환자와 의사의 관계, 또한 정신과의사와 외과의사의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35년 이상 psychonephrology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오오 다 선생님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환자로서 섭생의 많은 방 법도 물론 오오다 선생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2000년 요코하마 국제 Psychonephrology 학회를 주최했을 때 뉴욕의 Levy 교수가 나와 오오다 교수의 관계를 mentorship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972년 10월, 아내와 나는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나의 본심은 “결혼하고 싶다”였지만 “자기 생명에 대한 보장이 없다”, “아내를 미망인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라는 생각에서 “결혼을 포기해야겠다”라고 6월에 입원했을 때 마음먹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기로 한 이상 “내 아내를 절대로 미망인으로는 만들지 않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에 그녀는 투석환자가 된 남자와 결혼했던 것입니다. 언젠가는 미망인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 다. 사실 이때에 동경여자의대에서 투석을 받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고 단지 한 사람, 12살이었던 소년이 지금 51세로 생존해 있을 뿐입니다. 아내는 의사이면서 신장센터에 들어와 오 오다 교수의 조수가 되었습니다. 투석과 신장이식을 전공하는 외 과의사가 된 것입니다. 그녀는 나의 처이면서 또한 나의 주치의 이기도 했고, 결국 장남, 장녀 및 차남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나는 처와 2남 1녀 자식들 덕분에 살아올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족의 존재가 내 생명의 근원이었습니다. 이 가족의 응원, 지지 및 격려가 나를 원기 있는 투석환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는 이 시기를 투석과의 허니문 시기라고 부릅니다. 내 경우에 는 다행히도 이 시기가 오래 지속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kill형 투석기계가 보급되어 있었는데, 어쨌든 성 능이 나빠서 판 위에 깔아놓은 셀로판 막이 터지기 쉽고 많은 혈 액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감염이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이런 트 러블이 매번 발생했고, 또한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잘못하면 6-7 시간 혹은 10-11시간씩 지속했습니다. 아침 8시 30분에 병원에 가서 돌아오는 시간이 밤 11시쯤 된 적이 가끔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일본 투석연구회 학술지에는 “투석으로 1년간 장기 생존한 임상 예”라는 논문이 당당하게 게재되었습니다. 1년을 가지고 장기라 하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사실 투석실에서 는 거의 매일 투석 중 죽어가는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39년 전 일본 투석실의 상황이었습니다.

 

1년 있다가 coil형 투석기계가 나왔습니다. 이것으로 겨우 신 체가 안정되었고 정신도 침착해졌습니다. 오오다 교수는 “투석으 로 죽을 일은 없다네. 투석환자로서의 규칙, 즉 물과 투석식이의 제한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되네. 결혼은 당신의 인생을 연장시킬 것이고, 아기도 낳을 수 있다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오래 살 걸?”하고 말해주었습니다. 오오다 선생은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수행하는 의료에 대한 자신, 확신을 가지고 있는 의사 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오오다 선생이 잘해야 “10년이겠지”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렇게 오래 살 수 없었겠지요. 이런 낙관론과 긍정적인 마음이 중요합니다. 사실 나는 모교의 투석실 의사가 “투석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라고 늘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많은 환자 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투석으로 사는 것은 기계의 힘으로 사 는 것이요, 기계에 의지한 목숨이다. “죽음의 불안”은 따라다닌 다. 그러나 5년쯤 지나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투석과의 허니문 시기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큰 합병증으로 입원하게 되면 “죽음의 불안”이 다시 생겨납니다. 39년이나 투석으로 살아왔으면서 이런 경험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42세 때 동경에서의 입원, 48세 때 빈혈에 의한 협심증, 60세 때 심장혈관에 스텐트 삽입, 68세에 척추관 협착증 수술과 중환자실 입원, 이런 죽음의 불안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특히 42세에 입원했을 때에는 그 후 1년간에 걸친 요양 이 혹독했습니다. 1982년 2월 동경에 숙박했을 때 아까사까의 뉴자판호텔에 화재가 일어났으나 다행히 탈출했고 생명을 잃지 않았습니다. 화재 다음날이 월요일이었는데, 투석 중 혈압이 200을 넘었고 코피가 멎지 않았습니다. 헤파린과 오른쪽 코에 난 작 은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출혈이 멎지 않아서 응급으로 동경여자 의대에 입원하면서 많은 실혈, 체력 저하, 면역력 저하 등 악조 건이 겹쳐서 나는 감염증이 합병되고 고열이 지속되었습니다. 드 디어 패혈증이 되었고 2개월 후에는 결핵이 생겼습니다. 투석환 자의 결핵은 전신 결핵혈증 (tubaculosidemia)으로 진행하였 습니다. 잘 먹고, 체력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결국 동경여자의대를 퇴원해서 집에서 통원치료 하면서 요양하게 되었습니다. 회복하는데 1년이 걸렸고, 하루 걸러 투석을 위해 다니 는 것이 나의 일과였습니다. 그 투석 중에도 고열이 나고, 이 열이 다음날에도 떨어지지 않는 현상이 계속되었습니다. 또 그 다 음 날에도 그런 것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나는 식욕이 없어지고, 체력이 저하되었습니다. 집에서는 그저 침대에서 안정했고, 종일 자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점점 우울증 상태가 되었고 3개월이 지나도록 회복할 기미 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3개월이 되어도 회복할 조짐이 없었습니다. 겪어보지도 못한 이런 우울상태가 지속되었고, 불안이 심하고, 신경질이 나서 “이것이 우울증이다”라고 자가진단을 하 고는 항우울증제를 복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항결핵제도 먹었습니다. 이 두 가지 약이 효과 있었는지 한 달 후부터 회복하기 시작해서 CRP가 음성이 되었습니다. 열도 없어졌습니다. 1년 후에야 겨우 직장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70세가 지난 지금에는 심방세동, 이단맥, 관상동맥협착증, 아 밀로이드 전신침착과 그것에 의한 통증, ADL 저하, 보행곤란,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화”가 장기 투석의 결과로 일어났습니다. 싫어도 멀지 않은 장래에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장남은 35 세, 외과의사로 10년 이상 원기 왕성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작 년에 결혼해서 손녀가 4월에 출생했습니다. 장녀는 32살로서 정신과 의사가 되었고 두 자녀가 있습니다. 차남은 29살, 작은 부띠끄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도 금년에 결혼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 부부에게는 3명의 손자가 있습니다. 투석환자면 서 이러한 넉넉한 인생을 겪는다는 것도 많은 투석 의료진들의 덕택입니다. 그리고 오오다 선생님과의 만남이 컸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나의 처, 아리꼬의 존재가 큰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세 명의 자녀들 덕입니다. 따라서 감사하는 마음이 장기생존의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70세가 된 작년 12월 생일날에 찾아온 Levy 교수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You are a model for all people with kidney fail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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